처음으로   시인의 마을   세상이야기  
아이디 비밀번호 auto  
시낭송    시와음악     창작마을     앨 범    자료실       녹음의뢰    게시판    home admin  
올린이: 天竺 (pcsos@thrunet.com)
홈페이지: http://www.fine114.co.kr
OS: all
구분: 문서
2004/3/2(화)
조회: 12423
추천:
한국 전통 음악의 이해를 위하여  
서언

일월영측이라는 말이 있다. 해도 달도  차면 기울고, 기울었다간 다시  찬다는 뜻이다.
그런가 하면 화무십일홍이요, 권불십년이라는 말도 있다. 모든  것은 시시각각으로 변하
는 것이며, 한결같을 수는 없다는 이치를 암시하는 말들이다. 동양의  고전 중의 하나인
주역(周易)이라는 말이 새삼 절실하게 실감이 가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것은 잠시도 쉬지 않고 두루 변해간다는 주역이라는 말뜻처럼 근래의 우리네 주변
을 살펴 보면 실로 많은 변화를 느끼게 된다. 경제적인  측면과 정치적인 측면이 그러하
며, 사회적인 여건과 문화적인 환경이 그러하며, 더 나아가서는 우리들의 의식구조나 역
사적 안목이 또한 그러하다.
바로 이같은 변화와 전환의 물결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현상의 하나라면 곧 우리의 전
통문화와 고유한 예술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의 점진적  증대라고 하겠다. 넓은 의미에
서는  한국학 내지는 기층문화에 대한 이같은 일반의 관심전환은, 적지 않은 기간동안의
갈등과 시행착오를 통한 자아의식의 확립과 주체적 시대의식의  터득에서 얻어진 소중한
결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기실 서구음악이 홍수처럼 밀어닥칠 때는  우리의 전통
음악은 그 명맥마저 이어가기가 힘든  시절이 있었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흐르는 세월과 함께 우리의 문화적 안식과 예술적 환경도 많이 바뀌어 이제는 제법 내것
을 배우고 내것을 이해해보려는 능동적인 의지가 점점 팽대해가고  있음이 사실이다. 국
제화 시대에 대응하여 우리의 개성적 예술을 이해해야겠다는 당위적인 입장에서건, 혹은
점차 다원화되어 가는 생활여건 속에서  보다 다채로운 예술 향유의  효용성을 절감해서
건, 아니면 문화적 뿌리의식이나 민족적 동질성의 확인을 통한  확고한 자아정립의 필요
서에서건간에 일단 이같은 자문화지향적인 풍조나 의식의 전환은 대단히 고무적이고도바
람직한 시대적 조짐이 아닐 수 없다.

전통음악의 이해를 위한 몇가지 착안점

식물성 질감이 펼쳐내는 화평한 음색

한국전통음악 전반에 걸쳐서 한결같이  공통되는 특징은 아니겠지만  특히 수제천(壽濟
天)이나 영산회상(靈山會相)같은 합주음악은 더없이 화평하면서도 유순한 정감을 안겨다
준다. 이같은 분위기를 창출해내는 원인은 여러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이겠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이유라면 아무래도 음악의 기본요소 중의  하나인 음색(音色)을 만
들어내는 악기의 재질(材質)에 있지 않나 한다.
여기 자칫 되외시하기 쉬운 음색의 중요성을 확인하기 위해서 잠시 서양음악사의 한 예
를 원용해 볼 필요가 있다고 하겠는데, 멀리 그리스 시대의 키타라(Kithara)라는 현악기
와 아울로스(Aulos)라는 관악기의 실례가 그것이다.
키타라는 아폴로제전에 쓰이던 낭랑한 음색의 현악기이고,  아울로스는 디오니소스제전
에 쓰이던 조금은 선정적인  음색의 관악기이다. 이 아울로스는  소아시아로부터 유입된
악기인데 고상한 분위기에서의 연주는 배척되었을 뿐아니라 그리스음악의 농암하고 방일
(放逸)하며 정열적인 측면을 대변하던 악기이다. 바로 이같은 역사적인 사례에서 착안할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이라면 하나의 악기의 음색이 그 활용되는  장소의 분위기에 얼마나
좌지우지 영향을 주고 있느가 하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아폴로제전의 분위기는 키타라
라는 낭랑한 현악기의 음색으로 대표되고 있으며,  디오니소스제전의 분위기는 아울로스
라는 끈끈한 점토질의 음색으로  상징되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하겠다.  이처럼 키타라와
아울로스를 각기 아폴로의식이나 디오니소스의식에 연결시켜 볼 때 청아우미하다는 아폴
로적 분위기는 결국 낭랑한 음색의 현악기인 키타라의 분위기 바로 그것이었다고 하겠으
며, 또한 관능과 물아의 디오니소스적인 분위기는 선정적인 음색의 관악기인 아울로스의
음색에 다름아니었다고 하겠다. 바로 이같은 맥락에서 볼 때 결국 순수미와 균제미를 특
징으로 하는 고전주의(古典主義)가 아폴로제전에 뿌리를 두고,  열정과 황홀의 감성미를
특성으로 하는 낭만주의가 디오니소스제전에서 잉태된 예술사조라는 사실은 결국 키타라
라는 현악기의 음색적 분위기와 아울로스라는 음색적 분위기가  각기 개념화된 것이라고
해도 관언이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 거론한 키타라와 아울로스 악기의 예를 감안하거나 혹은 회화에서의 파렛트의
역할처럼 여러가지 개성의  음색을 배합시키는 작업인  관현악법(管絃樂法)이라는 것이,
음악역사상 그토록 큰 비중으로 오랜세월에 걸쳐서 꾸준히 변천해오며 항상 새로운 음세
계를 추구해오고 있다는 사실등은, 모두가 음악예술에서의 음색의 중요성과 효용성을 단
적으로 웅변해주는 사례들이라고 하겠다.
사정이 이러하고 보면, 어느 특정문화권의 음악의 특성을 알아보기 위해서  그 당대 문
화권의 음악이 주로 어떠한 재질의 음색을 선호하느냐 하는 점을  가름해보는 것은 당연
하고도 적절한 수속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 한국전통음악의 특질을 찾아보
기 위해서는 의당 서양악기의 재질과는 크게 다른 한국전통악기의 식물성 질감이 운위되
지 않을 수 없는 터라고 하겠다.
주지하시다시피 서양음악에 편성되는  악기는 금속성(金屬性) 재질이  주류를 이룬다고
하겠으며, 한국전통음악의 그것은 식물성(植物性) 재질이 대종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같은 단정에 상치되는 예외사항도 있겠지만 확실히 서구적 감각은 금속성 선호가
강하고 우리의 기본적 감각은 식물성 선호가 농후함을, 양자의  음악에 편성되는 악기의
면면을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이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우선 서양악기의 재료에는 쇠붙이가 필수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이올린
이나 첼로와 같은 현악기의 경우에도  공명통 위에 철사줄을 팽팽하게  메워서 사용하고
있으며, 지난날 목관이었던 플루트가 지금은 철저하게 금관이라는  사실과, 혹은 트럼펫
이나 혼, 튜바 등 아예 쇠붙이로만 된 금관악기가 많이 개발되어 두로 쓰이고 있다는 사
실 등은 모두가 저들의 금속성 선호의식을 증명하는 내용들이라고 하겠다.
이에 비해서 우리 전통음악의 악기들은 식물성 재질의 악기임을 알  수 있는데, 멀리는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악기들이었던 삼현삼죽(三絃三竹)이 그러하고,  근래까지의 대
중적 악기편성이었던 삼현육각편성을 보아도 하나같이 쇠붙이 악기는 배제되어 있다. 오
늘날 널리 쓰이는 대금이나 단소같은 관악기가 대밭의 대를 그대로  옮겨온 전형적인 실
물성 악기임은 물론이고 거문고나 가야금같은 현악기는 오동나무  공명통에 명주실로 꼬
은 줄을 얹어서 사용하듯이 끝까지 금속성을 배제시키고 있는데,  이같은 우리나름의 목
질선호감각(木質選好感覺)은 조선시대에 유독 목공예가 발달했었다던가 혹은  한때 시도
되었던 철사줄을 메운 가야금인 철금의 보급이 끝내 좌초되고 말았던  사례 등을 상기해
보면 쉽게 수긍이 가는 일이라고 하겠다.
서양과 우리의 민족감각이 각기 금속성선호냐 식물성선호냐를 단정하는 일은 잠시 차치
하고라도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라면,  지금까지 구체적인 내용을
예시해왔듯이 현재의 서양음악에는 금속성악기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많고 한국의 전통음
악에는 식물성 재질의 악기가 현저하게 중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같은 사실을
전제로 할 때 한국전통음악의 포괄적인 첫인상은 연하고 따뜻한 목질감에서 오는 유순하
고도 화평한 분위기의 모성적  음악이라고 하겠으며, 서양의 그것은  날카롭고도 견고한
금속성 질감에서 오는 냉정하고도 이지적인 무드의 부성적 음악이라고 하겠다.
역시 동서음악의 차이는 궁극적으로 동서인들의 인생관과  자연관으로부터 유래되는 것
이라고 결론지을 수 밖에 없다고 하겠는데, 결국 철저한  인지(人智)와 인공을 가미해서
쇠붙이 악기를 만들어내듯 자연에 대한 도전적인 자세를 가진 서구인들은 그들의 논리적
감각을 바탕으로해서 날카로운 이지의 음악문화를 계발해왔으며,  삼척 오동판으로 음풍
하고 농월하던 우리의 선인들은 자연에 대한 철저한 순응의 자세에서  우러난 달관된 감
성으로 더없이 화평하고도 정감적인 감성의 음악예술을 직조해냈다고 하겠다.

호흡에 기준을 둔 폐부의 음악

시간예술이라고 지칭되는 음악에 있어서  템포의 완급은 대단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
다. 똑같은 곡이지만 템포의 기준을 어떻게 잡아서 재현해내느냐에 따라서 그 음악의 악
상은 판이하게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처럼 중요한 비중을 지니는 템포의 인지감각도 각기 문화권에 따라서 혹은 민
족에 따라서 상이할 수 있으니,  동일한 속도의 음악을 듣고도 누구는  빠르게 느끼는데
비해서 누구는 느린 것으로 인지(認知)하기도 하는 예가 바로  비슷한 경우라고 하겠다.
결국 문화권에 따라서 템포의 인지감각이 다를 수도 있다는 사실은, 바꿔 말해서 서로의
문화배경이 다른 이유로 그들 각자가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모테라토'템포도 실제의 시
간적인 속도의 객관적 수치에 있어서는 커다란 차등이 있을 수  있다는 말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좀더 구체적인 표현으로 서구인이 모데라토라고 느끼는 빠르기가 메트로놈 수치
로 90회를 지칭한다면 우리의 그것은 20도 될 수 있고 30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듯이  한국의 전통음악은 서양고전음악에 비해서  비교적 한
배, 즉 속도가 느린 것이 분명한데 많은 내외국인들이 찬탄해마지 않은 대표적 정악곡인
수제천(壽濟天)이나 상령산(上靈山) 등속의 음악을 들어보면 쉽게 수긍이 될 것이며, 또
한 이같은 구체적인 음악의 예가 아니더라도 국악의 첫 인상을  일단은 '느리다'고 간주
해버리는 일반의 통념을 상기해보면 전래의 한국음악이 보편적인  서구음악에 비해서 한
배가 느린 것만은 틀림없다고 하겠다. 그러면 한국의 전통음악이  서구음악에 비해서 템
포가 유장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대답도 여러가지 문화적 혹은  민족적 특질과
연결해서 생각할 때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겠지만, 여기서 일단 템포의 계량적 단위인
박(拍)의 준거를 어디에 두고 있느냐에 따라서 템포관념의 차등이 생겼다고 가정해 보는
것이 정확한 접근이 아닐까 한다.
한국의 전통문화를 일별해 보면 그 저변의 잠재의식속에는 호흡을  중시하는 징후가 역
연함을 알 수 있는데, 이 점은 심장의 고동을 중시하는  서양적 의식성향과는 많이 다른
한국적인 특성이라고 하겠다. 기실 우리의 문화 속에는 호흡과  얽힌 용어가 한두가지가
아니다. 숨을 한번 내쉬고 들이마시는 동안을 하나의  시간단위로 설정하여 일식간(一息
間)이니 이식간이니 하는 양식척(量息尺)의  용례를 비롯해서, 감정이  격양되었을 때는
긴 호흡을 해서 감정을 누그러뜨리려 한다던가 또는 건강을 위한  단전호흡 등은 하나같
이 호흡을 중시하고 호흡에 뿌리를 둔 문화양상들의 좋은  예증들이라고 하겠다. 더우기
심장의 정지를 사망으로 단정하는 서양과는 달리 우리의 경우에는 '숨이 끊어졌다'는 말
로 유명을 달리했음을 표현하고 있듯,확실히 호흡의 문제는 모든 생리현상에서부터 문화
현상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의식저변에 두루 편재해 있는  공통된 민족적 문화소(文化素)
가 아닐 수 없다.
이같은 동서양간의 이질적인 의식성향을 염두에 두고 각자의 음악을  관찰해 보면 역시
양자간에는 템포의 기준이 서로 다르게 나타나고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가 있다. 즉 서
양의 템포관념은 주로 맥박, 다시 말해서 심장의 고동에 기준을 두고 있으며, 우리의 그
것은 호흡의 주기, 즉 폐부의 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양의 경우 박자
의 단위인 박(拍)을 비트(beat)혹은 펄즈(pulse)라고 하는데 여기 펄즈라는  말이 곧 인
체의 맥박을 의미하고 있듯이 서양음악은 원초적으로 심장을  기준으로해서 출발하고 있
다고 하겠으며, 이에 비해서  한국의 전통음악은 모음변화를 일으키면서까지  길게 장인
(長引)하여 호흡의 리듬을 타고 있음을 볼 때 역시 근원적으로 호흡에 뿌리를 둔 음악임
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서양음악의  경우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중간  속도인 '모데라
토'의 박수(拍數)가 본래는 메트로놈 수치의 90회 내외로서 1분간에 움직이는 심장의 고
동수에 가깝고, 우리의 전통음악은 영산회상의 기본곡인 상령산이나 가곡의 원형이랄 수
있는 초삭대엽(初數大葉)이나 이삭대엽(貳數大葉)같은 곡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메트로
놈 박수의 30회 내외로서 1분간의 호흡의 주기에 가깝다. 결국  한국음악에 있어서 안온
한 마음을 느낄 수 있는 모데라토의 기준속도는 서양의 그것에 비하면 마치 심장의 주기
와 호흡의 주기에서처럼 무려 3배쯤 느리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셈이다.
이처럼 한국의 전통음악은 호흡문화를 바탕으로 한  폐부적(肺腑的)인 음악이라고 하겠
으며, 서양의 고전음악은 맥박의 고동을 기준으로 한 심장적(心臟的)인 음악이라고 하겠
다. 따라서 한국의 전통음악이 유장한 맛에 정적인 명상성을 드러내는 것은 곧 폐부적인
속성에서 오는 것임에 틀림없고,  서양의 전통음악이 발랄한 분위기에  동적인 진취성을
강하게 띠고 있는 것은 바로 심장적인 속성에서 배어난 것임이 분명하겠다.

농현에 묻어나는 공유한 민족심성

한때 우리사회에서는 코리안 타임이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논리성과 정밀성이 돋
보이는 과학문명권의 서구문화에 심취하면서 저으기 부정적이며  자조적(自嘲的)으로 쓰
이던 시대어이기도 했다.
확실히 정시(正時)의 관념에 익숙치 못한 '코리안 타임'이라는 관행은 현대적 능률사회
에서는 불편하기가 여간 아니었다. 하지만 실용적인 차원을 떠나서  이같은 한국적 시간
관습이란 우리들의 의식구조 속에 맥맥이 흘러가는 우리들 고유의 민족심성을 그대로 상
징해내는 하나의 적절한 예증이랄 수가 있다. 코리안 타임이라는  시간관습이나 혹은 이
와 유사한 거리관념, 다시 말해서  묻는 길을 답변할 때의 우리다운  표현법에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될 사실이란 곧 양자의 경우 모두가 정확한 정곡(正鵠)을 흐리거나 감추는
예는 비단 이들 시간관념이나 거리관념에서만이 아니다.  구중궁궐이라는 말이 대변하듯
이 첩첩의 중문으로 차단되는 고건축이 그러하고, 육체의 질감을  드러내지 않는 풍성한
여유의 전통의상이 그러하며, 또한 자욱한 안개로 선명한 윤곽을  흐리게 하는 산수화가
그런가하면, 흔히 주어가 생략되는 우리의 일상적 구어체가 그러하다.
하기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시적인 문화현상에서만이 아니라  이처럼 핵심을 깊은
곳에 묻어두려는 성향은 비가시적인 의식 속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다.  그 좋은 예가 곧
조선조 선비들의 이상적인 생활패턴이기도 했던 용행사장(用行捨臧),  즉 자신이 필요로
할 때는 미련없이 물러나서 숨어사는 선비적 삶이 바로 그것이라고 하겠으며, 그밖에 은
군자(隱君子)라던가 혹은 처사(處士)니  은사(隱士)니 하는 말들은  그것이 도가류(道家
流)의 영향을 받았건 아니건간의 원인은 차치하고라도 모두가 '주체(主體)'를 가리고 숨
기는 한국적 의식성향이 여실히 함축되어 있는 좋은 예들이라고 하겠다.
바로 이같이 주체를 노출시키지 않는 잠재의식이 음악적으로 변용되어  표출된 좋은 예
증의 하나라면 곧 전통음악에서 그처럼 비중이 높은 농현(弄絃)이란 곧 현악기 연주법의
일종으로서, 가야금이나 거문고에서처럼 오른손으로 줄을 탄주할 때 왼손으로는 그 탄주
된 줄을 기묘한 방법으로 움직여서 여러가지 장식적인 음악을  창출해내는 것을 말한다.
장식적인 음을 만들어내는 기법에는 농현(弄絃) 전성(轉聲)  퇴성(退聲)등이  있고 이들
기법은 각기 그 특징과 용처가 관례화되어 있지만, 여기서 의미하는 농현의 개념은 서양
음악에서의 비브라토나 혹은 우리음악에서의 요성(搖聲)까지를 포괄하는  광범한 뜻으로
이야기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현악의 농현기법만이 아니라  시조창에서처럼 "청산-    
"하고 길게 장인되는 음을  잔잔하게 떤다던가, 기타 관악기에서의  섬세한 장식음이나
요성들은 모두가 농현이라는 이름으로 수렴될 수 있는 기법들이라고 하겠는데, 궁극적으
로 이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앞에서 언급했듯이 기본음을 이면으로 깊숙히 숨겨버리는 기
능을 독특히 해내고 있다.
음정(音程)의 높낮이를 4분의 1음(quarter tone, micro-tone)까지  쪼개가며 음 하나하
나의 정확한 위상을 지나치리만큼 까다롭고도 정밀하게 따지고  드는 서구적 음악실천에
비해볼 때, 마치 파도타기(surfing)를 하듯 기본음 자체까지도  일정일렁 살아 움직이며
그 고착된 화석화를 거부한  채 농현이라는 특유의 기법으로  '정체(正體)'를  흘려가는
우리의 음악관행은, 확실히 남과는 다른 우리적인 문화토양 속에서  발효된 가장 우리적
인 음악현상의 실체라고 하겠다.
이처럼 고정된 위상을 배격해가며 자기의 정체를 숨겨버리는 농현의 기법이란, 한낱 음
악내적인 기교에 불과한 것이 결코 아니고 이것이야말로 유가적인 겸양이나 도가적인 은
둔사상 등이 모질거나 차마 야박하지 못한 민족고유의 양순성과 맞아떨어지며 직조해낸,
우리 본연의 심성을 그대로 대변하고 상징하는 하나의 음악적 예증이라고 하겠다.

제례음악 속에 관류하는 음양사상

무릇 하나의 예술양식이나 문화양식은 그 시대사상을 떠나서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은 특히 요즘처럼 예술사회학이 풍미하는 시점에서는 당연한  상식처럼 치부되고 있
다.
이처럼 하나의 예술양식이 시대사상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일 수  있다는 사실을 웅변으
로 증명해주는 좋은 예증의 하나가 우리 전통음악의 일부인 제례음악이 아닐까 한다. 제
례악이 모두 그러하고 또한 딱히 제례악에 국한되는 현상만은 아니지만  대체로 현행 제
례악의 일종인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이나 문묘제례악(文廟祭禮樂)에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는 시대사상의 하나라면, 아무래도 일찍부터 우리문화의 내면에 맥맥히 흘러오
던 음양오행사상이 아닐까 한다.
기실 제례악을 거론하기 이전에 이미 전통음악과 음양오행이 서로  얽혀있는 예는 하나
둘이 아닌데, 한 옥타브내의 12의 이름을 각각 양(陽)에 해당하는 6율(六律)과 음(陰)에
해당하는 6려(六呂)로 구분하고, 또한 12음을 각기 12달과  12지(十二支)로 대비시킨 예
를 비롯해서, 궁 상 각 치 우의  5음을 금목수화토(金木水火土)의 오행(五行)이나  혹은
다섯가지의 색깔인 오색(五色), 다섯가지의 인륜(人倫)인 오상(五常)등에 대비시키고 있
는 예 등은 모두가 음악과 음양사상과의 밀착을 여실히 드러내  보이고 있는 예들이라고
하겠다.
이밖에도 음양사상은 악기의 배치법인 악현법에도 중요한 내재율로서 작용하고 있는데,
우선 전정악대(殿庭樂隊)에서처럼 법도에 맞는 갖추어진 음악의 경우에는 반드시 당상악
(堂上樂)과 당하악(堂下樂)의 두 그룹의 악대로 구분하여 배치하는 것이 원칙이며, 여기
높은 장소에 위치한 당상악은 음(陰)에 해당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음과 양의 위
치인 당하와 당상으로 갈라져서 배치되는 악대들은 다시 한겹 더  음양의 논리를 따라아
하는데양의  위치인 당하 즉 헌가(軒架)에서는  양율(陽律)의 음이 주음이 되는  음악을
연주해야 한다. 이같은 원리가 무너지고 당상에서 양율이 주음인  음악이 연주되고 당하
에서는 음려가 주음인 음악이 연주되기도 하여, 음양조화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의
시정을 건의 했던 세종 때의 박연(朴堧)의 상소문은 이들 악기배치법과 음양사상과의 함
수관계를 웅변해주는 단적인 예라고 하겠다.
전통음악과 음양사상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또다른 예로는 오늘날 연주되는 제례악
에서도 그 잔영(殘影)을 살필 수가 있는데, 조선조 왕가의 신위를 모신 종묘에서 일년에
한번 거행하는 종묘제례와 성균관대학에서 춘추로 봉행하는 문묘제례에서의 몇몇 악기배
치법이 그 예이다. 여기 몇몇이라고 한정어를 쓴 이유는 현행 악기배치법은 지난날의 배
치원리에서 많이 벗어나고 와해되었으며, 단지 한두개 악기의 배치법에서 옛날의 법도를
살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제례악의 등가에는 축이라는 악기와 어라는 악기가 쓰이는데 이들  두 타악기는 비교적
음양사상의 흔적을 온전히 지니고 있는  셈이며, 따라서 이 경우는 오늘날  우리 세대가
한국의 전통음악과 음양오행과의 상관관계를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하고
도 실감있는 예라고 하겠다. 축이라는 악기는 절구를 방불케하는  나무로 만든 타악기인
데 이 악기는 반드시 청색을  칠하고 동쪽(혹은 좌측)에 배치하며, 어라는  악기는 상자
위에 앉아있는 해태모양의 나무로 만든  악기로서 이 타악기에는 반드시  백색을 칠하며
서쪽(혹은 우측)에 배치시킨다. 또한 실제의 연주에 있어서도 축은  음악이 시작될 때만
사용되고, 어느 음악이 종료되는 때만 사용된다. 이같은 관행은 곧 동쪽은 해가 그 쪽에
서 뜨듯이 모든 사물과 현상의 시원을 뜻하고 서쪽은 해가 지듯이 모든 사안의 마무리를
뜻하는 철저한 음양오행의 원리에 입각한 것이다. 더욱 구체적인  용례로서 음악을 시작
할 때는 축이라는 악기가 그 특유의  독특한 리듬을 세번 반복함에 따라  비로소 합주가
일제히 시작되고, 음악이 끝날 때는 어라는 악기가 역시 그  특유의 일정한 리듬을 세번
거듭함으로써 일제히 음악은 끝을 맺는다. 바로 이같은 연주패턴을  단지 서구적인 음악
어법이나 음향개념으로 생각해서 음정이 어떠니 화성이 어떠니 하고  설명을 한다면, 이
것은 실제의 음악적 본질이나  내재율과는 거리가 먼  맹자단청격(盲者丹靑格)의 엉뚱한
우를 범하는 일임에 틀림없다고 하겠다.
여기서 우리는 전통음악과 음양오행이라는 시대사상과의 함수관계를  십분 헤아리게 됨
은 물론이려니와, 다른 한편으로는 굳이 예술사회학이니  음악사회학이니 하는 서구적인
학문추세를 원용하지 않더라도 한 민족의 예술적 특성은 그 전체의  문화구조 속에서 종
합적으로 파악되고 이해되어야 한다는 합당한 결론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는 셈이라고
하겠다.

전통음악의 계기성과 동이기질

앞서 '페부의 음악'항에서 국악의 완만성을 지적했지만 그같은 완만성과도 무관치 않은
또다른 측면의 특징으로는 국악의 단절없는 접촉성, 곧 계기성(繼起性)을  손꼽을 수 있
을 것이다. 사실 전통음악을 조금만 주의깊게 살펴 본다면, 우리는 이내 끊이지 않고 계
속 연주되는 국악의 계기성에 놀라게 된다.
국악의 계기성 혹은 접속성을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인 예를  몇개 들어보면 우리 정악
의 대명사처럼 널리 알려지고 또한 광범하게 연주되는 영산회상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
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영산회상(靈山會相)은 상령산, 중령산,  세령산, 가락덜이, 상
현환입, 하현환입, 염불환입, 타령, 군악등 모두 9곡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모음곡형식의
음악이다. 그런데 이들 9곡의 음악을 실제로 연주할 때는 각개의 곡과 곡 사이를 분리하
지 않고 계속 연주해간다. 다시  말해서 각개의 단위곡을 구분하는 잠시의  휴지도 없이
계속 이어지면서 연주해가는 것이다. 이같은 현상은 얼핏 대수로운 현상이 아닌 것 같지
만 서양음악에서의 모음곡(Suite)이  각기의 구성곡들을 예외없이  하나하나 분리시켜서
연주하는 관례에 비춰본다면 그야말로 현격한 차이의 우리만의 특징이 아닐 수 없다.
이같은 현상은 비단 영산회상과 같은 기악곡에서만의 특징이 아니고 성악곡에서도 마찬
가지이다. 서양의 경우 같으면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나  <물방아간집  처녀>의 예에
서처럼 소위 연가곡(song cycle)을 노래할 때에는 그 개체의  구성곡들을 따로따로 분리
시켜서 노래하지만 우리의 경우에는 그렇지가 않다. 전통음악에서 정악계통의 아정한 분
위기의 노래들을 통칭해서 정가(正歌)라고 부르는데 이 정가의  한 장르인 '가곡(歌曲)'
이 바로 그 좋은 예라고 할수 있겠다. 이 가곡은 초삭대엽, 이삭대엽, 평거, 중거 등 수
십개의 곡들이 무리를 이루어 엮어진 대곡으로서 마치  서양의 연가곡(連歌曲)과 흡사한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실제로 노래가 될 때는 이들 수십여 곡들을 단절시키지 않고 계속
해서 연창해간다. 그래서 우조의 초삭대엽에서 시작해서 조성이 계면조로 바뀌어 태평가
로 대단원을 마루리하기까지에는 무려 2시간에 가까운 긴 시간이 소요된다. 그러니까 가
곡을 정석으로 부르기 시작했다하면 한시간이 훨씬 넘도록 잠시도 음악이 단절되는 틈이
없이 계속 이어져 나가는 것이다.
이같은 연속성의 좋은 예는 요즘  유행하는 산조음악에서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산조의 기본골격은 명인(名人)에 따라서 간혹 예외적인 경우도 있지만 대개 진양조와 중
물이, 중중몰이, 잦은몰이 등 네개의 기본악장으로 짜여져 있는데,  이들이 연주될 때는
느릿한 진양조에서 시작해서 잠시도 쉬지않고 점점 속도를  가속시켜가며 잦은몰이 대목
에서 악흥의 절정을 만들며 끝을 맺는다. 서양음악의 소나타 협주곡에서처럼 템포배열마
저도 서로 대칭적인 악장들을 완전히 독립시켜서 연주하는 관행과는  달리, 우리의 그것
은 저들과 너무도 확연하게 대조되는 한국전통의 두드러진 특징이 아닐 수 없다.
하기야 전통음악의 연속성으로 말하자면 아마도 판소리를 당해낼 음악양식이 달리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판소리가 완창되려면 두서너시간이 넘게 소요되며, 춘향가같은 경우에
는 통상 8시간이나 걸리니 말이다. 그것도 서양의 오페라에서처럼 막과  막 사이나 장과
장 사이의 짬이나 혹은 배역의 분담도 없이, 혼자서  일인다역(一人多役)을 맡아가며 혼
신의 힘으로 8시간이 넘도록 계속 노래를 해 간다는 것은  아마 우리네 판소리를 제외하
고는 이 지구상의 어느 민족의 음악양식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우리만의 지구력이요 강
인성이며 연속성이라고 하겠다.
비단 전통음악에서만이 아니라 굿을 해도 며칠씩 계속하는 무속(巫俗)이나혹은 밤을 지
새우며 연회를 계속하는 민속놀이 과정에서도 이같은 강인한  지구성이나 계속성은 역연
히 나타나고 있는데, 바로 이같은 특성을 잉태시킨 역사적이며  문화적인 요인들이란 여
러가지로 규명될 수도 있겠지만 그들 요인 중에서 가장 근간이  되는 원인이라면 아마도
우리들 고래의 민족기질인 동이정신(東夷精神)에서 유래하지 않았을까 하는 확신이다.
많은 역사서들이 우리민족을 동이족(東夷族)이라고 지칭했던 사실은  익히 알려진 상식
이다. 그런데 여기 동이의 이(夷)자를 풀어보면 큰대(大)와 활궁(弓)자가 된다. 큰 활을
지칭하는 이(夷)자의 본래의 뜻은 어질다(仁)는 의미였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이(夷)라
는 글자 속에서 무용적(武勇的)인 측면과  어질다는 측면의 두가지 뜻이  공존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찌기 우리의 선인들이 큰 활을 메고  극동아시아를 누비고 달리며 유목생
활도 하고, 그러면서도 성정은 더없이 선량했었던 역사적 실상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는
글자가 곧 동이(東夷)의 이(夷)자라고 하겠다.
무용적인 측면만 두드러지면 거칠고 난폭해지기 쉽고 어진 기질만 두드러지면 유약하고
무기력해지기 쉽지만 여기 무용적인 씩씩한 기질과 선량한 기질이  조화되면, 결국 우리
민족 특유의 성품인 '은근과 끈기'의 외유내강(外柔內强)한 강인한 기질로 승화될 수 밖
에 없다고 하겠는데, 이렇게 볼 때 전통음악이나 전통놀이에서  확인되듯이 한번 노래나
놀이를 시작했다하면 잠시도 쉬지않고 그야말로 진이 빠질 때까지 계속하고 나서야 자리
를 털고 일어나는 그 집요한 강인성이나 지구력은 결국 고래의  동이기질이 변용되어 문
화구조의 저면으로 침잠한 것이라고 하겠다. 이같은 맥락에서 볼 때 국악에 나타나는 연
속성이야말로 우리들 동이정신의 음악적 화신(化身)이자 우리들 고유의 아이덴티티(iden
tity)를 가장 적나라하고도 상징적으로 대변해주는 예술적 증표가 아닐  수 없다고 하겠
다.

싱싱한 다이내믹이 펼치는 정관의 세계

촉급한 음악에서는 다이내믹을 감지하기  힘들지만 장단도 없는 듯  느릿한 음악에서는
쉽게 다이내믹을 느낄수 있으며, 특히 우리 음악과 같이 수평적인 개념의 선(線)적인 음
악은 다이내믹이 곧 생명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수제천이나  영산회상같은 기악곡과,
시조나 가곡같은 성악곡은 그 싱그러운 다이내믹으로 인하여 생명력이 철철 넘치며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들린다. 끝없는 수평선의 바다에 파도가 없으면  장엄한 바다의 참맛이
없듯이, 선율적인 가락에 다이내믹이 없으면 싱거운 음악이 되고 만다.  파도가 없는 바
다를 잠자는 바다라고 표현하듯이 다이내믹이 없는 음악은 생면이 끊긴  죽은 사물에 불
과하다. 특히 시조와 같은 단순한 가락속에서 다이내믹의 묘미를 뺀다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다.
이처럼 다이내믹을 원동력으로 하여 유유히 흘러가는 정악곡들은 우리에게 드넓은 정관
(靜觀)의 세계를 펼쳐다 준다. 이 정관의 세계란 우리 음악에 배어있는 우주적 속성과도
통하는 것이지만, 보다 후세의 종교적인 색채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라고 상정해 본
다. 쏴-- 하고 태산준령의 노송을 스치고 지나가는 다이내믹한  바람결이 파아란 창공으
로 사라지고 처얼썩 백사장을 때리고 간 은파의 무늬가 검푸른  수평의 저켠으로 달아나
듯, 신비한 청자의 색깔을 닮은 정악의 물결들은 그 활력있는 다이내믹으로 우리를 조금
씩 조금씩 저 파아란 관조(觀照)의 세계로 밀어내고 있는 것,  그것이 곧 그윽하고도 유
장한 정악의 세계이다. 선교가 풍미하던 고려조를 거쳐서 오늘에  이르는 국악이고 보면
그들의 체내에는 어딘가 불교적인 징후가 짙게 배어있음직도 하다.  사실 유장한 정악의
가락에서 선적(禪的)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어느 한  개인의 독선적인 편견만은
아님에 틀림없다고 하겠다. 고려의 자기가  비취빛 청색을 띠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 청색은 곧 드넓은 창공을  연상시키며 푸른 창공은 무(無)의 세계,  정관의 세계,
즉 색즉시공(色卽是空)의 불가적 세계를 상징하기 십상인 것이다.
이처럼 정악의 일면에는 분명 불교적 청색의 세계가 있으니 그것은 곧 유현심수한 명상
의 맛이라고 하겠다. 정악 중에서도  선도(禪道)의 세계에 한층 가까운 것은  보다 많은
침묵의 여백을 갖는 거문고같은 현악의 세계에서이다. 잔향이 그치고  침묵이 흐르는 여
운(餘韻)의 세계는 곧 회화에서의  여백에 해당한다. 새하얀 화폭의  여백에서 아름다운
예술적 환상이 피어오르듯 은은한 침묵의 여음 속에서는 우주적 섭리를 직관하는 관조의
예지들이 번뜩이고 있다. 따라서 여음은 한갖 사라져가는 원음의  잔향이나  종언(終焉)
이 아니고 피안의세계, 불교적 무의 세계로 이어지는 다리와같은  것이다. 여음은 곧 물
리적 현실음의 조종(吊鍾)임과 동시에 천상음(天上音)의 예시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음이
끝난 곳에도 천계의 음, 즉 우주적 계시는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산
사의 범조의 여운이 끝없이 이어져 33천에 이른다듯이 싱거우리만큼 간간히 실음이 울려
오고 오히려 침묵의 여백이 전체를 관류하는 듯한 정악 거문고의 여음은, 시공을 초월하
여 영원으로 물결치는 의식의 세계 바로 그것이라고 하겠다.
사정이 이러하고 보면 어느 외국음악학자가 음악에 있어서 쉼표의  비중이 그토록 오묘
한 줄은 우리음악을 듣고서 처음 절감했다고 실토한 말이나, 혹은 지난날 우리들의 선비
계층에서 관악기보다도 현악기를 더 좋아했던  사실도 쉽게 납득이 가는  일이라고 하겠
다. 특히 옛날의 풍류객들은 현악기 중에서도 구조적으로 여운을 길게  가질 수 있는 거
문고나 가야금같은 안현악기(按絃樂器), 즉 줄을 뜯거나 튕겨서 소리를  내는 악기를 보
다 좋아했고, 해금이나 아쟁같이 활로 줄을 마찰시켜서 소리를 내는 찰현악기(擦絃樂器)
는 아예 관악기계통으로 치부해 버렸다는  사실들은 모두가 우리네 선조들이  과연 정악
속에서 희구했던 정신적 대상이 무엇이었겠는가 하는 점을  분명히 답해주는 사례들이기
도 하겠다.
조금 다른 측면에서의 이야기지만 국악의 생명은 연주에 매였다는 말을 음미해 보는 것
도 국악의 이해를 돕는 길이라고 하겠다. 예로부터 국악활동이라면  거의가 연주활동 위
주였으며 창작활동이란 거의 불모에  가까왔다. 창작이 부진했던 이유는  여러 각도에서
설명이 되겠지만 우선 선인들의 음악관에 의해서 많이 좌우되었다고 상정해  볼 수가 있
다. 보수적인 기질도 기질이려니와 소위 유교적  예악사상(禮樂思想)이 풍미하여 음악을
수신의 필수요건으로 숭상하던 시대사조  속에서는 누구나가 지고지순한  음악에 함부로
손을 댄다는 것은 감히 생각지도 못할일이었다고 가정해 볼 수  있고, 또한 몇몇 고전적
인 음악서적을 보면 그같은 가정이 십분 수긍이 될만한 유사한 기록들이 눈에 많이 보이
는 것도 사실이다.
창작활동이 부진했던 또다른 이유라면 역시 새로운 신작의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한 시
대적 분위기에도 원인이 있지 않나 생각이 드는데, 도시 음악의  용처란 뻔한 것이었다.
어느 강력한 패트런(patron)이 나와서 새로운 음악을 계속 주문한 사실도 없고, 고작 궁
중내의 대소 연회나 제향에 충당되는 것이 거의 전부였으며, 일부 사대부계층의 수신 내
지는 파적(破寂)거리로 기능하던 것이 정악 분야의 대종을 이루어온 것이 사실이니 말이
다. 이처럼 음악의 용도가 협소하다보니 몇몇 기존곡들로서 그  음악적 소임을 해내기에
충분했을 뿐 아니라 많은 신작의 필요성은 절감하지 못했을 것이다. 더우기 음악을 접하
는 정신적 자세란 음악 자체내에 뿌리를 두는 것이 아니고  초월적인 세계로 몰입하려는
음악외적인 차원에 초점을 두었던 만큼, 이같은 선인들의 음악관은  한층 신작의 부진을
부채질했다고 하겠으며 또한 이같은 역사적인 상황이 바로 오늘날과 같은 전통음악의 양
적인 영세성을 낳게 되었고도 하겠다.
여하간 원인이야 어디에 있건간에 국악의 레퍼터리는 영성하기 그지없다. 바로 이 영성
한 레페터리를 가지고 궁중의 악공들을 비롯한 옛날 연주가들은 평생의  업으로 삼고 정
진해 왔다. 장강의 물결이 거친 돌을 갈고 닦아 고운 태깔의 조약돌을 만들어내듯, 일생
을 통한 이들의 각고의 공력은  삭일대로 삭이고 무르익을대로 무르익은  완벽한 경지의
음악을 만들어 내었다. 정말 신의 경지에 들 만한 신격의  연주었음에 틀림이없었다. 신
들린 경지의 연주란 자신과 연주행위와의 혼연일체가 이루어진 상태이다. 악기나 악곡이
자신의 영육(靈肉)과 동체가 되어 생명의 호흡을 함께하는 경지이다.  손에 잡은 악기에
는 핏줄이 이어지고 소리내는 악곡에는  자신의 혼백이 넘실 댄다. 따라서  신들린 악인
(樂人)의 개성있는 연주는 그것이 곧 단순한 재현아닌 새로운  창작이다. 그래서 우리음
악에는 굳이 작곡가가 따로 있을 필요가 없었다. 우리네  전통음악에 파생곡과 변주곡이
많은 것도 바로 이같은 맥락에서이다.

흥과 신명의 한마당, 민속음악

지상에서 하늘을 바라본 음악이 정악이라면 하늘에서 지상을 바라본 음악은 민속음악이
다. 다시 말해서 우주지향적인  것이 정악이라면 현세지향적인 것이  민속악이라고 하겠
다.
정악이 원경으로 숲을 보며 우주의 섭리를 생각한 음악이라면, 민속음악은 숲숙의 나무
를 보며 인생을 생각한 음악이라고 하겠다. 신비한 자연의 철리가 머무는 심오한 회청색
의 청자빛이 정악의 상징이라면, 일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한낮같은 순백의 백자빛이
민속악의 심벌(simbol)이라고 하겠다. 민속악은 곧 태양이 밝혀주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
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백색의 잔치, 원색의 향연이다. 그것은 모든  인습의 둑을 무너뜨
리고 도도히 흘러내리는 인간 본연의 감정이 펼치는 일대 몰아의 오지(orgy)이다.
국악에서 민속악이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한 시기는 영 정조  무렵으로 보아 마땅할
것이다. 실학사상을 위시한 당시의 시대여건은 민속악이 자랄 만한  충분한 분위기가 조
성되어 있었다. 민속악의 종가(宗家)라고 할 수 있는 판소리도  이때를 전후하여 정립되
었고, 기악면에서의 산조음악도 그 이후의 민중감정의 팽배에 따라 형성된 것이다. 육중
한 정악정신의 틈바구니에서 질식할 듯하던  순순한 민중의 감성이 훈훈한  봄의 입김을
맞은 것이 바로 조선조 말엽이었으며, 정악의 시김새라는 테두리  안에만 유폐되어 기생
하던 민속악의 편린들이 의젓한 하나의 음악 장르로 독립된 것도 이즈음의 일이다. 여하
튼 조선조 말기로 내려오면서 국악사상에는 획기적인 변혁이 온  것이다. 음악상의 민권
회복이 이루어진 셈이다. 우주적인 밀어를 속삭이던 삼척(三尺)의 거문고 줄에는 어느덧
흥청거리는 산조의 가락이 넘실대게 되었으며 광대하고 천시받던  판소리 명창들이 어전
에서 재롱을 부리게까지 세상은 많이 변했던 것이다.
민중의 정서로 얽어지는 민속악의 본질은 즉흥적인 신명에 있다고 하겠다. 음악을 엮어
가는 원동력은 다름아닌 흥과 신명이다. 오직 신명 속에서  절창(絶唱)이 이루어지고 흥
이 없으면 지리멸렬한 음악으로 전락되고 만다. 따라서 어제의 기막힌 절창도 흥의 여하
에 따라서 오늘은 졸작이 될 수도  있고, 오늘의 미진함이 내일의 갈채로 바뀔  수도 있
다. 일고수이명창(一鼓手二名唱)이라는 판소리계의 용어도 기실 민속악의 본질은 어디까
지나 흥과 신명에 있음을 대변해주는 말이다. 따라서 민속악의  세계에는 고정된 형식이
없다는 표현도 가능하다. 흥과 신명이 이들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흥과 신명이 일렁이는
곳에 일정한 틀이 있을 수 없다. 흥이 나면 밤을 새워가며 노래를 할 수도 있고 흥이 죽
으면 도시노래가 되지를 않는 세계가 곧 민속악의 본바닥이다.
한편 민속악의 경우에는 일정한 끝이 없다. 다시 말해서 창자의 기분 여하에 따라서 그
길이가 길 수도 혹은 짧을 수도 있다. 흥이 넘치면 한바탕의 산조를 얼마든지 늘려서 길
게 연주할 수 있고 흥이 진하면 몇십분으로 줄일 수도  있으며, 신바람이 나면 몇시간의
판소리 연창에도 기진하지 않으며 신명이 나지 않으면 단가 한마디에도  목이 걸리는 것
이다. 이처럼 특히 민속악의 경우에는 일정한 음악적 종지가 없이 창자나 연주가의 흥에
따라서 그 음악의 길이가 융통성있게  조정될 수 있는 것이다. 원색의  인간감정 앞에는
모든 규칙이며 형식이 와해돼 버리고 마는 것이다.
정관(靜觀)의 세계를 닮은 정악에는  감정의 기복이 절제되지만 현실의  생리를 표출한
민속악에는 감정의 고저가 심하다.  따라서 민속악에서는 정악에 없는  클라이맥스가 많
다. 죄었다풀었다하는 감정의 이완과 빠른 템포로 몰아붙이는 클라이맥스가 민속악의 본
령이다.
그래서 민속악에는 눈물이 있고 웃음이 있다. 기지와 해학이 넘치는 애드리브(adlib)와
변화무쌍한 템포의 이완촉급(弛緩促急)으로 청중을 웃겼다하는 것이 민속악 공연의 참맛
이다. 그래서 고달픈 세사에 시달린 민중들은 이 천태만화의  감정의 파노라마속에서 묻
혀 잠시 자기를 잊고 현실을 잊어 보는 것이다.
정악의 세계가 아폴로적이라면 민속악의 그것은 확실히  디오니소스적인 속성의 세계이
다. 거기엔 뜨거운 열정이 있고 황홀이 있으며 망아의 광란이 있다. 인간 본연의 감성이
난무하는 세계에서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인간 구분을 향한 절규가 있다.  인간 본능의 세
계를 절제하려는 것이 정악정신이었다면 인간 본능의 감정을 집요하게 추적해온 것이 민
속악의 본령이었다. 하지만 인간 본능의 해방을 성취하고 이제 그 원색의 향연속에서 본
능의 세계를 마음껏 구가하고 있는 민속악의 기본정신이  인간구원의 원형회귀를 지향하
고 있다는 것은 묘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느린 진양조로부터 중몰이와 중중몰이를 거쳐서 잦은 몰이로 숨가쁘게 치닫는 민속악의
장단 배열을 보라. 그것은 현실을 잊게 하는 최면의 과정이며 내세를 향한 주술(呪術)의
과정이다. 확실히 진양조의 느릿한 템포는 무당의 주문암송과 닮은 데가  있다. 우선 듣
는 이의 감정을 차분하게 침전시키고 한곡으로 몰두시켜가며  차츰차츰 현실을 망각하게
만들어가고 있다. 기복없이 유장하게 이어져가는 리듬이며 가락이 한층  우리의 얼을 현
실과 차단시켜가며 최면의 대해로 이끌어 간다. 진양조대목에서 완전히 속연을 끊어버리
면 중몰이나 중중몰이대목에서는 점차 현실을 초탈하려는 의지가 일렁이기 시작한다. 천
계의 세계가 열렸다닫혔다하는 단계하고 할 수 있으며, 영혼의 리듬과 생체의 리듬에 맞
아 떨어지는 흥겨운 이 대목은 곧 모든 인간사를 잊어버리고  피안의 세계로 들어가려는
일종의 법열(法悅)의 장이요 '무애(無碍)'의 춤판이라고 하겠다.  이처럼 중몰이에서 입
신(入神)의 준비가 끝나면 드디어 자지러지게 죄어드는 잦은몰이에서는 접신(接神)의 성
사(聖事)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현실의  세계에서 환상
의 세계로 이행(移行)되는 것이다. 분명히 민속악의 속성에는 현세를  잊고 내세로 뛰어
넘으려는 소위 통과제의(通過祭儀)적인 요소가 있고  거기엔 또한 먼 태고의  저쪽 끝에
있을 인간의 시원(始原), 인간의 원형으로 회귀하려는 강력한 의지가 깃들어 있다.

정가와 판소리의 맛

여름은 우리를 설레게 하는 계절이다. 산으로 바다로 대자연의 품  속에 잠겨든다는 것
은 마치 인간이 자신의 본향을 찾아 어머니 품 속으로 돌아와 안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
덧없는 세사에 탐닉타가 돌아온 방랑자가 언제나 한결같은 고향의 숨결에서 문득 진실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듯, 여름은  어쩌면 신이 인간에게 부여하는  계시의 순간들인지도
모른다. 자연의 섭리를 외면한 채 콘크리트 밀림 속으로만 칩거하는 인간의 우둔함을 일
깨우려는 연례적인 성무(聖務)행사가 다름아닌 짙푸른 여름의 계절일 것이다.
이처럼 싱그러운 계절에 펼쳐지는  대자연의 섭리를 맞아들일 채비로서  우리가 해야할
일은 자명하다고 하겠는데, 그것은 곧 대자연을 향한 예의바른 정장을 하는 것이라고 하
겠다. 여기 예의바른 정장이란 곧 속된 인위의 옷을 벗어던지는 일일 것이다. 가식의 옷
을 벗고 오만의 옷을 벗고, 그야말로 적나라한 속말이 나올  때까지 세속의 껍질을 벗겨
가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이 완전히 자연으로 귀일(歸一)했을 때, 그곳엔 어느덧
망망한 지평에 동이 터오듯 은은한 자연의 음성이 들려오게 된다.
바로 이때에 들려옴직한 소리, 즉 대자연과 혼연일체가 되었을 때 제격이랄 수 있는 음
악이 지상에 존재한다면 아마도 그것은 시조나 가곡과 같은 우리네 정가(正價)계통의 음
악이 아닐까 한다.
특히 시조음악은 너무도 자연을 닮았다. 한가로운 시골어귀의  정자나무밑 정경을 연상
해 보자. 적절한 크레센도(cresendo)와 데크레센도로 노송사이를  스쳐가는 산바람의 다
이내믹, 여름날의 정적을 한층 두텁게 깔아가는 매미의 울음소리, 반쯤  눈을 감고 한낮
을 반추하는 일소의 입놀림, 하얀 구름마저 미류나무 가지에 걸려 졸고있는 전형적인 여
름철 대자연의 한 모퉁이에서 오수를 즐기던 촌로(村老) 한분이 목청을  뽑아 소리를 냈
다고 하자. 과연 그때의 음악이란  템포에 있어서나 선율의 흐름에 있어서  어떤 성격의
음악이어야 제격이랄 수 있을까. 바로 시조창의 속성 그것이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
조의 생명은 노송을 스쳐가는  산바람의 다이내믹처럼 오묘한  역동감(力動感)을 주는데
있으며, 그것의 참맛이란 여름날의 정적처럼 깊은 관조의 세계를 펼쳐주는  데 있다. 시
조의 템포가 시간을 반추하는 일소의 이미지를 닮았다면 그것은 곧 부생공자망(浮生空自
忙)이라고 부평초같은 인생들이 공연히 바빠들하는 도회의 생리를 넌지시 꼬집어주는 것
이겠으며, 시조의 선율이 단조로운듯 여울져오는 매미소리를 닮았다면 그것은 곧 번문욕
례(繁文縟禮)의 부질없는 짓거리들로 자승자박하고 있는 세사의 허상을 찔러주는 것임에
틀임없을 것이다.
한편 판소리 음악은 영락없이 질뚝배기를 닮은 소리라고 하지 않을 수 없으며 질뚝배기
또한 판소리를 빼어 닮았다고 하겠다. 마치 판소리가 민중감정의  저수지이듯 거기엔 확
실히 서민의 체취와 애환이 응축되어 있다. 거기엔 멍석에 누워  별을 헤던 서민의 꿈이
있고, 등잔불에 실을 잦던 초가의 전설이 있다. 또한 거기엔  역겹도록 일그러진 서민의
한이 있고, 바보스럽도록 질박한 촌부의 인정이 있다.  질뚝배기는 여러면에서 판소리를
닮았다. 비단 판소리만이 아니라 국악에서 느낄 수 있는 모든 판소리적인 요소를 상징하
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선  질뚝배기와 판소리는 주인이 같다. 모두가  서민에 의해서
육성되고 애용되어 왔다. 가곡의 짝인 청자가 사대부들의 애완물이었고, 가사를 닮은 백
자가 양반이나 중인계층의 기호품쯤 되었다면, 판소리를 닮은 질뚝배기는 어디로 보아도
서민의 편에 놓일 수밖에 없다고  하겠다. 청자가 근엄한 도포자락에  어울리고, 백자가
새하얀 한산 세모시 자락에 비견된다면,  질뚝배기는 아무래도 올이 굵은  무명 중의(重
衣)적삼에 비교될 수 있다. 문방사우와 산수병풍의 사랑방에는  청자와 가곡이 제맛이라
면, 초가삼간 짚방석에는 질뚝배기와 판소리가 제격임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깔끔한 청
자가 가곡의 속성을 대변하고, 담담한 백자가 가사음악을  대표한다면, 텁텁한 질뚝배기
는 도리없이 판소리의속성을 머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껄낄껄낄한 질뚝배기의 질
감은 어쩌면 그렇게도 판소리의 창법과 비슷한지 모를  일이다. 수리성(聲)이니 발발성,
아귀성, 파성, 항성, 철성 등 가지가지의 판소리의 창법을 들어보라.  한마디로 말할 수
없는 그 다양한 판소리의 창법에서 느끼게 되는 근원적인 미감이란  곧 질뚝배기에서 느
끼는 미감과 동일선상에 있음을 우리는 확인하게 될 것이다.
질뚝배기는 겉으로 보아서 그 진미를  모르듯, 판소리 음악도 얼핏  흘려들으면 그렇게
거칠고 우악스럽기만 할 수가 없다. 얼굴에 핏발을 세워가며  우직스럽게 질러대는 판소
리 창은 오직 억지와 불협화음의연속 같이 생각되기 일쑤이다.  하지만 뚝배기보다는 장
맛이라는 속담처럼 판소리 창에 귀가 트이게 되면 그때는 그 껄끄럽고 거친 발성들이 그
렇게도 구수하고 절묘하게 느껴질  수가 없다. 가성(假聲)을 기피하는  판소리는 그만큼
꾸밈이 없다는 얘기가 된다. 유약에 신경을 안쓰는 질그릇처럼, 생긴 그대로를 드러낼뿐
이다. 가성이 없음은 가식이 없음과 통하고, 이는 곧 진실의  절규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판소리 창의 그 목쉰듯 거친 음성은 질뚝배기의  진실을 담은 것이요 이는
또한 서민의 진실, 서민의 애환과 적나라한 원색의 감성을  잔재주없이 직설적으로 분출
시키는 것이라고 하겠다. 판소리 연창에는 늘 웃음이 있고 눈물이 있으며 해학과 욕설과
신명이 함께하는 것은 모두가 껄끄러운 질뚝배기처럼 늘 서민의 일상에  함께 해오고 있
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이름   메일   회원권한임
  내용 입력창 크게
                    폼메일 발송 수정/삭제     다음글    
      회원권한임
파 일 설 명추천OS구분조회
  한국 전통 음악의 이해를 위하여   all  문서   12423
  한국 음악의 개념 정의와 그 범위 提議   all  문서   7430
  우리음악사를 움직인 음악   all  문서   5048
  요한 세바스찬 바하(1685.3.21 아이제나흐 - 1750.7.28 라이프치히)   all  문서   18362
  비발디에 관한 재밌는 이야기  1 all  문서   8669
  사계(四季, The Four Seasons)   all  문서   6307
  바로크시대의 음악정리   all  문서   10592
  동양음악개론  -4 all  문서   22242
  낭만주의 (Romantic, 1800~1910)   all  문서   12023
  故 김현식님의 아름다운 글들입니다.   all  문서   17184

 
다음       목록 쓰기


......Copyright(c) 2004 My DHK0401. All rights reserved......>